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2 군사반란 (문단 편집) === 진압군 측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YwZLWWJctQk, width=100%)]}}} || 이 사건 이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고문]]을 당한 이후 불명예 제대를 당했다.[* 며칠동안 곡괭이 자루로 두둘겨 맞고 물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와 함께 쿠데타를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박정희를 암살하고 뛰쳐나온 김재규에게 육본으로 가자고 한 것도 정승화였으며 김재규 체포 명령을 헌병감 [[김진기]]에게 하달한 것도 정승화였다. 자세한 것은 [[10.26 사건]]참조 ] 최고 계급인 [[대장(계급)|대장]]에서 최하 계급인 [[이등병]]까지 '''무려 17계급을 강등당했다.''' 물론 전두환이 [[백담사]]로 들어간 이후에는 대장으로 복권되었으며, 1987년 대선에서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취임하면서 김영삼의 추격전에 일조할 때도 당연히 대장이라고 다 불렀다. 이때 정승화 총장과 함께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 갔던 사람은 딱 5명인데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3총사와 이건영 제3야전군 사령관, 문홍구 작전 본부장이다.[* 이들 5명 외에 진압군 측에서 결사 항전한 사람으로는 육본 작전부장 하소곤이 있는데 공수부대가 들이 닥쳤을 때 권총에 손을 뻗었다가 흉부 관통상을 입어 병원으로 실려 갔다. 12.12 당시 유일한 장군 부상자. 그리고 왜 서빙고에 끌려가지 않았나 모르겠는데 안종훈 육본 군수참모부장은 장태완 사령관이 탱크로 밀어 붙이자고 했을 때 유일하게 찬성한 사람이다. 이정도가 진압군측 강경파들이고 나머지는 양다리 걸치거나 흐리멍텅. 대표적으로 진압군을 이끌던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이 양다리였고, [[김종환(1923)|김종환]] 합참의장과 [[류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흐리멍텅. ] (이중에서 김진기 준장은 서빙고에서 나오자 마자 바로 자진 예편원을 내서 제외하고) 12월 24일 국방부에서 발표하기를 정 총장은 김재규의 내란방조죄 라며 구속 입건 하며, 이건영 중장, 장태완 소장, 정병주 소장, 문홍구 소장 등 4명은 김재규에게 돈 받아 먹었으며 12.12 때 병력을 출동시키는 등 조직적인 저항을 했다고 밝혔다. 즉, 이들 몇 사람은 전두환 측에서 언론을 통해 공지할 정도로 12.12에 저항하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는데 일단 육사 11기인 전두환 소장보다 윗기수인 육사 5기(정승화 총장)~8기와 종합행정학교 출신들이 대대적으로 전역하게 되었으며 기수와 상관 없이 전두환 측에 비우호적인 세력들도 좌천되거나 군문을 떠나게 된다. 이로서 전두환과 하나회 일원들은 군부 요직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실권자가 되었고, 이후 이들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는 등의 피를 뿌리면서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미국은 처음에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초반 정보의 혼선과 부족으로 대응 시기를 놓쳤고 이때 [[지미 카터]]는 [[레임덕]]이라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전두환이 알아서 설설 기었기에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손을 떼며 사실상 전두환 정권을 묵인했다. 그 결과로 전두환 정부는 임기 동안 정치적으로 미국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다.[* 이때 미국에 갖다바친 조공 중의 하나인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항목을 참조. 그 이후 또 한번의 조공으로 민간 로켓까지 제한당해버렸다. 이는 한국의 우주 개발에 심대한 타격이 되어버린다. 결국 이 지침은 41년이 지난 2021년이 돼서야 폐기되었다.] 더군다나 당시 한국은 박정희와 카터의 대립으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카터의 외교정책과 전반적으로 성향이 맞지 않았고, 박정희가 독자적인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추진하면서 한미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때문에 전두환은 정권의 인정을 위한 적극적인 친미정책을 밀었고, 이에 레이건 정부는 물론 미국 군부의 주도로 [[전두환 정부]]가 묵인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과 [[5.18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을 미국이 별다른 조치 없이 침묵했다는 사실이 대한민국 내에 알려지면서 80년대에는 운동권을 중심으로 반미감정이 거세게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1982년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미국은 1987년 [[6월 항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전두환 정권이 무력 진압을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도 한다. 정승화 외 진압군 주요 인사들이 반란 세력에게 당한 처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각 인물 문서에도 나와 있다. '''수도경비사령관(소장) [[장태완]]'''은 체포 후 서빙고로 끌려가 수사를 받은 후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당하고 6개월간 가택 연금을 당했다. 이후 아버지를 잃고, 심지어 [[참척|아들까지 잃는]] 안타까운 일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그 후엔 전두환의 화해의 제스쳐였는지 1982년에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공기업인 [[코스콤|한국증권전산]] 사장직을 제안했고 장태완이 이를 수락해서 공기업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전두환과 직접적인 갈등을 겪은 사람은 정승화였고 의외로 장태완은 12·12 군사반란 이전까지는 전두환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군에서 밀려나게 된데다가 간접적인 피해(아버지와 아들의 죽음)까지 입었던 장태완에 대한 전두환의 사과였을 것으로 보인다.] '''육군특수전사령관(소장) [[정병주]]''' 역시 체포 후 현역부적합 판정이란 명목으로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당했다. 이후 1988년 10월에 실종되었고 이듬해인 1989년 3월에 양주군 장흥면의 빈 부대막사에서 자살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장태완은 정병주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호소했다. [[자살로 위장된 타살|심지어 시계는 실종될 무렵에서 멈춰있어 타살의혹이 강하다.]] '''육군본부 헌병감(준장) [[김진기]]'''는 체포 후 국군보안사령부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준장 신분으로 자진예편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수 차례 공직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지냈다. '''제9공수여단장(준장) 윤흥기'''는 쿠데타 직후 여단장 직위를 하나회 출신의 [[이진삼]](육사 15기)에게 넘겨줘야 했다.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진압군 편에 섰던 공수여단장이었지만 비중이 큰 것은 아니어서 위의 세 장군들 처럼 강제 예편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이후 소장 진급에는 성공했으나 신군부 세력에 찍혀 소장이 되었음에도 사단장을 절대 하지 못 했다.[* 보통 소장 1차 보직은 사단장이다. 사단장을 못 하면 중장 진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980년 육군본부 교훈처장을 거쳐 1983년 1월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부 차장[* 해당 보직은 21세기에 들어 합참 작전부장, 육본 정보작전지원부장과 더불어 중장 진급 가능성이 높은 소장 보직이다.]을 끝으로 전역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대장) [[류병현]]'''은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한미연합사의 특성상 미군과 연결되어서 쿠데타 세력도 건드리지는 못하였고, 이후 군 인사에서 내무부 장관으로 입각한 김종환 대장의 뒤를 이어 합참의장[* 다만 이 시절에 합참의장의 힘은 상당히 약한 명예직에 가까웠다. [* 이 당시에는 각군 참모총장들이 [[군령권]]과 [[군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훗날 합참의장에게 군령권이 이관된다.]까지 지낸 뒤 대장으로 예편했다. '''육본 군수참모부장(소장) 안종훈'''은 장태완 사령관이 탱크로 밀어 붙이자고 했을 때 유일하게 찬성한 사람이다. 12.12후 육대 총장을 거쳐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밀려난다. 80년 5월 17일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지휘관 회의 때 유일하게 할말이 있다며 발언권을 얻은 사람인데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한다.'라고 하였다가 전역조치 된다. 이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군부로부터 직간접적인 [[하야]] 압박을 받았고, 결국 친구 [[김정렬(1917)|김정렬]]의 하야 권유에 못 이겨 1980년 8월 결국 하야하고 말았다. 이 외에도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쿠데타 세력에 대한 대규모 영전이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제1야전군사령관(중장) [[김학원(군인)|김학원]], 제3야전군사령관(중장) [[이건영]], 합참 작전본부장(중장) 문홍구,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소장) 하소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소장) 황의철 등이 군복을 벗어야 했다.[* 이 외에도 육군본부 교훈참모부장 소장 채항석, 육군본부 작전참모차장 소장 안철원, 육군본부 예비군참모차장 소장 이호봉, 국방부 인력차관보 소장 유병하 , 민사군정감 소장 신정수, 제2관구사령관 소장 정상만, 제3관구사령관 소장 김종구, 제5관구사령관 소장 김명수, 육군교육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백윤기, 제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박승옥, 제2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곽응철,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김수중, 육군대학 총장 소장 김한용, 포병학교장 소장 박재종, 제2훈련소장 소장 이필조, 제2훈련소 부소장 준장 김병삼, 육군 행정학교 교수부장 준장 정우봉, 육본 감찰차감 준장 장영돈 등이 옷을 벗어야 했다.] 이들은 남은 계급 정년을 1년에 500만 원씩으로 계산받고 전역식 없이 허울뿐인 공로훈장과 퇴직금을 받고 군 문을 떠나야 했다. 1차 숙청에서 경질된 30명의 장성들은 대부분 육사 8~10기 혹은 갑종, 육군 종합학교 출신들로, 6.25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들이었으나 당시 육사 11기가 주류가 된 신군부는 이들을 부담스러운 선배들로 여겼고 결국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총 96명의 육군 장성이 신군부 세력으로 물갈이 되었다. 이 같은 개편 작업을 위해 1980년 11월에 군인사법이 개정되어 기존의 중장 계급정년은 6년에서 4년으로, 7년이었던 소장 계급 정년은 5년으로, 8년이었던 준장도 5년으로 대폭 단축되고 이로 인해 6.25기간 모집 되었던 준장, 소장급 비육사 출신들은 대거 옷을 벗어야 했다. 또한 개각이 병행되어 반란 당시에 한심한 행보를 보였던 국방장관 [[노재현]]이 경질되고 공군참모총장 [[주영복]]이 국방부 장관으로 영전하였다. 그리고 총무처 장관도 친 하나회 성향을 보였던 국방부 차관 [[김용휴]]로 내정되었으며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이희성]]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전보되면서 중앙정보부 1차장 [[윤일균]]이 다시 직무대리를 맡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